경제

통화정책과 재정정책, 이제는 공조가 아니라 충돌이다

맼으로 2025. 4. 24. 08:45

 


1. 통화정책과 재정정책, 공조의 시대에서 균열의 시대로

오랫동안 우리는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이 한 방향을 향해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이를 ‘정책 공조’의 전형이라 여겨왔다. 특히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부터 코로나 팬데믹 직전까지 이어진 장기 저물가, 저성장 국면에서는 확장적 재정과 완화적 통화정책이 서로 보완하며 경기 회복을 이끄는 것이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조합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전 세계는 갑작스러운 공급망 붕괴와 인건비 상승, 지정학적 리스크 심화, 그리고 장기적인 구조 변화에 직면하면서 인플레이션이 일시적이 아닌 ‘상시적 변수’로 부상했다. 이로 인해 통화정책의 목표는 다시 ‘물가안정’으로 회귀하고 있고, 반면 정치권은 경기부양과 민심 확보를 위해 여전히 확장적 재정을 원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은 더 이상 동조하는 축이 아니라, 서로 긴장하고 때로는 충돌하는 이중 권력 구조로 작동하게 된다.


2. 중앙은행 독립성, 이상에서 현실로

이러한 정책 간 균열은 결국 중앙은행의 독립성 문제로 귀결된다. 전통적으로 중앙은행의 독립성은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수단의 독립성, 즉 금리, 유동성 공급, 공개시장조작과 같은 정책 수단을 자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능력이다. 다른 하나는 정책결정의 독립성, 즉 정부로부터의 영향 없이 통화정책의 방향 자체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다.

 

문제는 고물가 시대가 도래하면서, 후자의 독립성—즉 정책결정의 독립성—이 구조적으로 약화될 위험에 처했다는 점이다. 물가가 높아질수록 중앙은행은 긴축을 통해 인플레이션을 억제해야 하지만, 정치권은 민생 안정을 명분으로 금리 인하를 원할 수밖에 없다. 특히 선거를 앞둔 시기에는 통화정책의 독립성은 현실 정치에 의해 침식될 위험이 더 커진다.

 

트럼프 대통령이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을 향해 금리 인하를 요구하고, 심지어 해임을 거론했던 것이 그 상징적인 예다.


3. 미국만의 문제가 아닌, 한국도 마찬가지다

이런 현상은 결코 미국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도 이미 유사한 구조적 긴장을 경험하고 있다. 한국은 명백히 장기 저성장 국면에 진입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경기부양을 위한 완화적 통화정책의 필요성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한국은 저금리가 유발하는 부동산 가격 상승과 가계부채 급증이라는 고질적인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다. 이로 인해 기준금리 인하의 순기능보다는 역기능이 더 크게 부각되는 상황이다.

 

이런 맥락에서 통화정책과 재정당국 간의 긴장은 점차 일상화될 수밖에 없다. 재정부는 금리 인하를 통해 민간 소비와 투자를 자극하고 싶어 하겠지만, 한국은행은 가계부채 연착륙과 자산시장 안정을 우려하며 보수적인 기조를 유지하려 할 가능성이 높다. 이는 단지 의견 차이가 아니라, 정책 목표 자체가 충돌하는 구조적 불일치다.


4. 충돌은 제도의 문제일까, 시대의 요구일까?

이처럼 통화정책과 재정정책 간의 균열은 이제 특정 인물이나 정치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거시정책 운영 체계 자체가 구조적 전환기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주는 징후라고 볼 수 있다. 저물가 시대에는 정책 간 공조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지만, 고물가 시대에는 각각의 정책이 다른 방향을 지향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긴장이 내재되어 있다.

 

중앙은행의 독립성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그 독립성이 ‘지켜야 할 가치’로만 남아있고 실질적으로는 정치의 영향 아래 흔들릴 수 있다면, 우리는 새로운 거시정책 운영 원리를 고민해야 할 시점에 와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까지의 '공조의 시대'를 넘어, 갈등과 균형의 거시정책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